홍어들아!! 장군감이재?? 앙망문 쓰고싶盧?
김대중의 대업적!! 보시라!!
1. 김대중이 남한의 대북전문가(국정원-경찰-기무사-검찰) 4000명을 일거에 불법 숙청시킴
2. 그것도 모자라 북한에 심어넣거나 포섭시켰던 고정간첩 리스트를 김정일에게 넘겨줘서 죄다 죽음.
1998년 김대중이 남한의 대북전문가 4,000명을 숙청했다는 것은 사실로 확인되었다.
2011.12.25자 중앙선데이는 김대중 정부가 98년, 이종찬 국정원장-이강래 기획조정실장의 주도로 남한의 대공전문가 4,000여명(국정원 581여명, 경찰 2,500여명, 기무사 600여명, 검찰 40여명)을 일거에 숙청했다는 사실을 끈질기게 추적하여 사실임을 확인했다.
해직자 중 송영인 국사모 대표가 이끄는 20여명이 이에 저항하여 행정소송을 냈고, 법원은 2003년 9월 “불법 면직이기 때문에 집단해직은 무효”라는 판결을 냈지만 당시 좌익정권은 이 판결을 철저히 무시했다. 중요한 결론은 국정원의 집단해직이 불법이었다는 것이다.
김대중이 국정원-기무사-경찰-검찰에 훈련돼 있는 대공전문가 4,000여명을 일거에 불법 숙청한 사실은 무엇을 말하는가? 이 하나의 사실만을 가지고도 김대중은 북한의 통전부 출신, 인민무력부 출신, 일반주민들이 같은 목소리로 증언하는 “김대중은 김일성수령의 전사”라는 것을 확신케 함과 동시에 우리에게는 역적이라는 사실을 인지케 한다.
김유송은?
여기에서 우리가 김대중의 역적행위에 대해 하나 더 보태고자 하는 것은 김유송의 증언이다. 김유송은 북한군 상좌출신 탈북자이자 500만야전군 조직기획국장이며 대한민국에서 유일한 황제버섯을 재배하면서 많은 탈북자들을 고용하고 있는 업체의 대표이며 시스템클럽에는 다윗이라는 필명으로 좋은 글을 많이 쓰고 있다.
중앙선데이는 2011.12.25자 발행본에서 우리가 30여년에 걸쳐 북한에 공들여 심어놓은 300명 정도의 우리측 협조자들이 일거에 처형됐다는 김유송의 증언을 소개했다. 이번 2월 5일자 중앙선데이는 이 사실에 대해 집중 조사-취재했다.
김유송의 증언 요지
“북한에 우리가 심어놓은 우리 측 간첩 300명 정도가 1998년 10월에 일거에 처형됐으며, 이들 중에는 3성장군인 임태영과 2성장군인 우명훈이 있다. 이들이 바로 박대통령 시절에 우리가 북에 심어놓은 간첩이며 이들은 처형되기 전까지 만 30년 동안 들키지 않고 출세를 잘했다. 그런데 김대중이 남한에서 4,000여명의 대북전문가를 대량학살한 후부터 갑자기 체포되어 9월말부터 조사를 받고 10월에 모두 처형됐다. 이는 어떻게 해서 가능한가? 김일성의 전사 김대중이 명단을 넘겨주었기 때문이다.”
당시 김유송은 “총참모부 국제연합무역회사 함경북도 무역관리 소장”으로 일본-중국-러시아와 무역을 하여 높은 사람들은 물론 그 지역을 관할하는 보위부(우리의 국정원) 간부들에게 달러와 신기한 고급 상품들을 선물로 주면서 넓은 인맥을 유지해왔었다.
98년 9월 말, 김유송은 평양에 있는 여러 지인들을 만나기 위해 평양시 인민무력부사택단지(아파트단지)를 찾았다. 그때 김유송은 그와 절친하게 지낸 인민무력부 검찰부 5처 처장(수사처 대좌)으로부터 음산한 말을 들었다.
“자고 일어나면 몇 사람씩 없어진다. 지금은 초비상사태다.”
김유송은 총참모부 보위사령부 책임지도원 모 상좌로부터 대강 이러이러한 사람들이 체포됐다는 소식을 들었다. 지금 김유송이 기억하는 사람들은 다음과 같다.
안피득 상장: 인민군 총참모부 부총참모장 (김유송과 매우 가까운 사람)
임태경 상장: 인민무력부 경보병지도총국장(사령관): 김유송과 가까운 사람
우명훈 중장(2성): 인민군 총참모부 2전투훈련국장(게릴라훈련국장)
이상일 소장(1성): 64해상저격여단장(우명훈의 처남)
성명불상의 소장: 금강산발전소 건설여단 참모장
성명불상의 소장: 2군단 정치부장
이런 인물들을 포함해 장성급 100여 명, 대령급 50명, 사회안전부ㆍ당의 고위급 150여 명이 체포돼 간첩 혐의로 거의 다 처형 됐다고 했다. 300명 중 150명 정도는 총참모부 보위부에서 조사했고, 나머지 150명은 국가보위부에서 조사했다고도 했다. 임태영과 우명훈은 총참모부 보위부의 관할이었다. 이 두 사람은 김유송과 매우 가까운 사이였다. 가끔 달러도 주도 가족도 돌봐 주었기에 이들 장군들은 김유송을 매우 좋아했다.
그 조사관은 김유송에게 아래와 같은 취지의 말을 해주었다.
“1968년 1.21 청와대 침투사건에 투입된 조원은 33명이다. ‘방차대’(후미담당) 요원이 3명이었는데 이들은 아파트 옥상에 있다 다 잡혔다. 조장과 (조장의 이름은 들었으나 김유송이 잊어버렸음) 림태영과 우명훈이 집힌 것이다. 남조선 보안사가 이들 3명에 귀순하기를 강요했다. 가장 먼저 조장에게 귀순하기를 강요했더니 그 조장은 죽어도 못한다고 버티었다. 그래서 날이 시퍼런 작두를 가져와 이 작두에 목이 잘려 죽겠느냐고 했더니 스스로 작두에 목을 얹었다. 그의 목과 몸은 순식간에 두 동강이 나 작두의 양쪽에서 한동안 뛰었다. 이를 본 두 사람은 기가 질려 얼굴이 노래졌다. 그리고 귀순 및 충성서약서를 쓰고 지장을 찍었다. 남조선 정보기관은 최고의 자리로 출세해서 남조선에 충성하라며 이들을 북으로 보냈다. 처형은 했지만 사실 안됐더라, 작두에 목이 잘려 피가 솟구치고 머리와 몸이 펄펄 튀는 것을 보고 누군들 항복을 하지 않을 수 있갔는가?”
김유송과 보위부 상좌와의 대화는 이러했다.
김유송: “30년 동안 모르던 사실을 어찌 지금에서야 알았으며 어떻게 300명이나 되는 간부들이 단번에 집단으로 숙청될 수 있는가?”
보위부 상좌: “김일성의 전사 김대중이 남조선 대통령이 됐는데 그가 못할 게 뭐 있는가?”
김유송은 이와 같은 말을 인민군 보위사령부(국정원) 9군단 담당 책임지도원인 김선우 상좌와 나전-선봉 담당 책임지도원 선우영호 상좌 그리고 보위부 2국 고려호텔책임지도원 김상욱 등으로터 계속 들었다.
김유송 자신도 이들과 가까이 지냈고, 이들에게 달러를 제공한 혐의(정부전복음모조직에 정치자금 조달죄)로 체포되어 15년 형을 받고 복역 중 지인들의 도움으로 탈출해 2001년 한국에 왔다.
김유송의 증언은 얼마나 신뢰할 수 있나?
과연 이 경천동지할 증언이 사실인가? 중앙선데이는 김유송의 신뢰성에 대해 추적해 들어갔다. 300명 집단처형의 핵심을 풀 열쇠는 작두에 놀라 전향한 임태영과 우명훈이다. 과연 그들의 이름은 북한에 존재하는가?
124군 부대에 근무했던 사람은 김유송말고도 또 있다, 지방에 거주하는 박모씨다. 그가 어디에서 탈북했고, 언제 왔는지는 신변보호 문제상 밝힐 수 없지만 중앙선데이는 2012년 2월 3일, 박모씨를 김유송과 함께 만났다. 박모씨는 임태영과 우명훈의 존재를 알고 있었고, 그 두 사람이 1.21 청와대침투사건에 투입됐다가 영웅적으로 탈출했다는 사실을 내용으로 하는 정신교육을 받았던 사실, 1.21사건에 투입된 사람은 31명이 아니라 33명이라는 사실도 증언했다.
청와대 침투조가 31명이 아니라 33명이었다는 것은 김유송이 늘 주장해 왔던 이야기이며 중앙선데이는 이번의 제2차 추적에 31명이냐, 33명이냐에 대해 많은 조사를 했다.
김유송은 중앙선데이 기자들과 함께 파주에 묻혀 있는 그들의 묘지를 찾았다. 모두 28명에 해당하는 묘가 있었다. 상위2명, 중위 2명, 그리고 나머지는 다 소위였다. 그런데 여기에는 팀장으로 보도된 인민군 김종웅 대위의 묘가 없다. 김종웅 팀장은 분명 잡혔고, 그가 팀장인 것이 다 확인되었는데 그의 묘가 여기 파주에 없는 것이다. 그의 묘는 다른 곳에 있든지 그냥 유실시켰는지 두 가지 중 하나일 것이다, 결론적으로 확인된 사살자는 29명이 된다. 여기에 김신조를 합치면 30명이고, 임태영과 우명훈을 합치면 32명이 된다.
중앙선데이는 당시 68년 당시 김신조 조사 책임자였던 백동림씨(당시 대위, 10·26사태 때는 보안사 1국장으로 사건을 조사했다)로부터 침투조가 33명이었음을 확인했다. 이 정도면 청와대 침투조가 33명이었다는 것까지 증명이 된 셈이다. 해명되지 않는 숫자는 33명 중 오직 1명뿐이다.
작두 이야기
당시의 보안사가 작두로 방차대 3인조 조장의 머리를 과연 잘랐는가? 중앙선데이는 국립기록원에 가서 사진을 찾아냈다. 그리고 머리와 목 잘린 몸뚱이의 존재를 확인했다. 다른 시체들은 모두 총을 맞고 사살된 시체인데 오직 하나의 시체만 목이 잘린 것이 사실로 확인된 것이다.
대부분의 국민들은 작두에 목을 잘랐다고 하면 상부터 찡그리고 그럴 수 있겠느냐 반문한다. 그러나 실제 목과 몸이 두 동강 난 사진이 확인된 것이다. 하지만 1968년 당시에는 그 누구도 목 잘린 시체에 대해 아무런 궁금증을 나타내지 않았다. 여기까지를 다시 정리해 보자.
1) 실제로 목이 잘린 시체는 있었다. 그런데도 한국에서는 이에 대해 주목하는 사람이 없었다.
2) 김유송이 와서 목이 잘린 시체가 있을 것이라고 가르쳐 주었다. 그리고 그 목이 어떻게 해서 잘렸는지에 대한 북한 최고 보위부 상좌로부터 전해들은 이야기를 그대로 남한사회에 전했다.
3) 청왜대 침투조로 왔다가 사경을 극복하고 북으로 돌아간 임태영과 우명훈은 영웅으로 칭송되어 그 무용담이 북한 특수군 장병들에 교육되었다는 사실은 김유송(124군부대 8대대)도 증언했고, 김유송의 후배로 124군부대 7대대에 있다가 86년 소좌로 예편하여 4-5년 전에 탈북한 박모씨도 중앙선데이에 증언했다.
4) 하지만 박모씨는 86년에 소좌(소령)으로 예편하여 사회로 나갔기 때문에 임태영과 우명훈이 처형되었는지는 알지 못한다.
그렇다면 1) 98년에 공화국영웅 임태영과 우명훈이 처형된 사실, 2) 그들이 처형되었을 때 남한이 키운 300명의 우리간첩들이 처형된 사실, 3) 그리고 임태영과 우명훈이 작두를 피해 전향을 했다는 사실은, 아직까지는 오직 김유송만이 알고 있는 정보다. 그러면 김유송이 증언한 위 세 개의 내용은 아직은 객관적으로 증명되지 않은 것들이다, 이 부분에 대해 우리는 어떻게 평가해할 것인가?
김유송의 애국적 증언, 80%는 증명됐고 20%가 남았다.
김유송은 본명을 밝히기로 작정했다. 자기 시간, 자기 돈을 소비하면서 500만 야전군 활동에 중추적 역할을 수행하고 있으며, 중앙선데이의 취재 조사에 적극 응했다. 그는 오랜 동안 정보사에 협력했다. 2006년 10월 9일 북이 핵실험을 했다. 그런데 김유송은 그 후 20일이 채 못 되는 시점에 길주군 풍계리 핵실험 장소에서 4km 떨어진 지점의 물과 흙을 채취해 정보사 박 중령에게 제공했다.
북극성 간첩사건에서 흑금성은 1명의 대령과 2명의 중령이 북에 갔다가 왔다고 진술했다. 그런데 북에 갔다 온 장교들을 처벌하지 않은 것은 그들이 풍계리 핵실험장소 부근의 물과 흙을 가져온 공로가 있어 처벌하지 않았다고 답변한 것으로 기억한다. 바로 그 흙을 김유송이 가져다 준 것이다.
필자는 김유송의 증언을 100% 믿는다. 왜?
북한에 2개 사단(서부지구 2집단군 예하에 2004년 제22 및 제23사단)이 추가로 창설됐다는 사실도 그가 증명해 주었고, 실제로 그는 그의 조직을 가동하여 GPS(위치추적장비)를 휴대케 하고 북으로 보내 이 사실을 증명해주었다한다. 그리고 휴전선 전체에 800개의 벙커를 지은 사실을 알려주었고, 그 중 240개는 진짜이고 나머지는 우리를 속이기 위한 위장진지라는 사실, 그리고 그 용도와 구조에 대해서도 그 공사를 진행한 현장 장교를 중국에 불러 정보사에 확인시켜주기까지 했다. 그의 신뢰성에 대해서는 정보사도 인정할 것이다.
김유송은 북한 최고의 정보기관인 보위부간부는 물론 군의 장성들을 두루 사귀고 지내왔다. 이런 사귐을 바탕으로 그는 김정일이 죽자 가장 먼저 앞으로 북한은 장성택이 이끌어 갈 것이며 장성택은 중국식 개방을 할 사람이라고 예언했다. 아직은 그의 예언이 잘 적중 돼가고 있다,
그는 살아있는 김신조에 의해 우리사회에 자리 잡고 있는 “31명의 침투조”를 부정하고 33명임을 자신 있게 증언했고, 이는 사실로 확인됐다. 김유송은 한 사람의 목이 작두에 잘렸다고 했다. 중앙선데이는 이것이 사실인가를 알아내기 위해 44년이 지난 지금 국립기록원에 가서 목 잘린 시체를 확인했다.
김유송은 남한에서는 아무도 모르는 임태영과 우명훈의 존재를 우리에 알려주었다. 그런데 이 두 사람의 존재는 전 124군 부대 7대대에 있었던 박모씨로부터2012,2,3.에 확인했다.
김유송은 김대중이 김일성이 심은 고정간첩이라 증언했다. 그런데 김유송과 같은 증언을 한 사람은 통전부 전간부 장혜영(김대중은 김일성수령의 전사)을 비롯해 탈북자들이 쓴 5.18증언집 “화려한 사기극의 실체 5.18”에도 6명 더 있다.
대통령은 1998년의 정보기관을 조사하라, 특명내려야!
1998년 김대중은 대한민국 대북전문가 4,000명을 한 번에 숙청했고, 김정일에 핵자금을 대주면서도 “북은 핵무기를 개발할 의도도없고 능력도 없다.북이 핵을 개발하면 내가 책임지겠다”며 북의 핵개발과 전력증강을 적극 도왔다, 이런 자라면 능히 북에 우리가 키운 간첩자료를 모두 넘겨주고도 남을 인간이다.
김대중은 김정일이 통전부에 내린 지령대로 남조선의 정보능력과 정보망을 쑥대밭으로 만든 역적이다. 그리고 필자는 김유송의 증언을 100% 사실로 믿는다. 국정원을 포함한 1998년의 주요 정보기관들은 1998년에 우리가 키우는 간첩들의 명단을 북으로 보냈는지에 대해 조사를 받아야 할 것이다. 대통령은 이를 위해 특별명령을 내려야 한다.
http://joongang.joinsmsn.com/article/385/7288385.html?ctg=1000&cloc=joongang|home|top
객관성 결여 100%
저천벌을 다받을라면 부관참시가 답일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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