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ttps://v.daum.net/v/20240928105100907
대구항쟁이 대구폭동으로 불리며 진실이 왜곡되는 현실을 슬프고 착잡한 마음으로 지켜본 독립운동가 중의 한 분이 채충식이다. 칠곡과 대구 지역의 저명한 활동가였던 그의 이름을 일제강점기 유력 일간지에서 확인하는 것은 어렵지 않다. 그가 34세 때 발행된 1927년 11월 19일 자 <조선일보> 5면 중간에 이런 기사가 있다.
"경북 칠곡군 신간회 총무간사 채충식 씨는 모사건 피의로 왜관경찰서에 검거되엇든바 지난 십오일에 경북경찰부로 호송하얏다가 그 이튿날인 십륙일 대구에서 방면되엇다고."
일제강점기 신문보도에서는 독립운동 사건이 명시적으로 표기되기 힘들었다. '모(某)사건'이란 표현은 그런 분위기의 산물이다. 그가 '모사건'으로 끌려간 것은 한두 번이 아니다. 경북사학회가 발행하는 <복현사림> 제32집(2014년)에 실린 역사학자 김순규의 기고문 '좌파민족주의 독립운동가 채충식'은 "독립운동을 하면서 23차례의 검거와 투옥을" 당했다고 소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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