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가 발렌타인데이 이면서 공교롭게도 안중근의사의 사형선고일이기도 했네요.
이 부분으로 인해 많은 얘기들이 오고가고
어느 지역에서는
발렌타인데이날이 안중근의사 사형선고일이라고 신문에 대서특필하며
광고를 내기도 했죠.
이쯤에서 발렌타인데이의 유래에 대해 먼저 짚고 넘어가볼까 합니다.
(펌)
성 밸런타인데이의 유래에 대해서는 로마교회의 성 밸런타인 주교가
군인들의 군기문란을 우려하여 남자들을 더 많이 입대시키기 위해 결혼을 금지하던
황제 클라우디우스 2세의 명령을 어기고 군인들의 혼배성사를 집전했다가
순교한 날인 2월 14일을 기념하기 위한 축일이라는 주장과 서양에서 새들이 교미를 시작하는 날이
2월 14일이라고 믿은데서 유래했다는 주장이 있다.
세계 각지에서 이날은 남녀가 서로 사랑을 맹세하는 날로써의 의미를 지니고 있다.
1936년 일본 고베의 한 제과업체의 밸런타인 초콜릿 광고를 시작으로
“밸런타인데이 = 초콜릿을 선물하는 날”이라는 이미지가 일본에서 정착되기 시작했으며
1960년 일본 모리나가 제과가 여성들에게 초콜릿을 통한 사랑고백 캠페인을 벌이기 시작한 것이 계기가 되어
여성이 초콜릿을 통해 좋아하는 남성에게 사랑을 고백하는 날로써의 일본식 밸런타인데이가 정착되기 시작했다.
모리나가 제과는 밸런타인데이에 남성도 좋아하는 여성에게 초콜릿을 주자라는 캠페인을 전개하기 시작하여
초콜릿상표 인쇄가 거꾸로 새겨진 이른바 〈逆초코〉시리즈를 발매하기 시작했다.
여성이 남성에게 초콜릿을 주는 날이라는 식의 일본풍 밸런타인데이는 과도한 상술에 대한 지적이 제기되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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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습은 그 이전으로 올라가지만,
안타깝게도 발렌타인데이에 쵸컬릿을 선물하는 풍습은 일본의 모리나가 제과라는 회사에서
시작되어진것이 맞네요.
그러다보니 안중근 장군의 사형일과 맞물린다는 점에서 우리가 그 사실을 간과해서는 안될듯 합니다.
단순히 웃고 즐기는 날이이었던 2월 14일...
제대로 알지못했던 저로서는 부끄러워집니다....
본론으로 들어가서...
여러분들은 안중근 장군의 삼형제에대한 기구한 운명을 알고계십니까..?
그리고 안중근 장군의 유해와 마찬가지로 두 동생의 유해도 어디있는지 모른다는 사실을....
안타깝지만 묘지가 없는 고독한 3형제인 셈입니다.
[출처] 묘지가 없는 고독한 영웅 안중근 3형제 (순흥안씨문숙공파) |작성자 치워니
안중근에게는 두명의 동생이 있었습니다.
안중근, 안정근, 안공근 이렇게 삼형제였죠.
먼저 둘째인 안정근은
(이하 펌)
안정근은 침략자 이등박문을 제거한 안중근의 동생이다.
20대 중반 이후 그의 생애는 안중근으로부터 절대적인 영향을 받았다.
한편으로 안정근은 안중근의 동생으로서 모든 한국인들로부터 존경을 받았다.
다른 한편으로 그는 일본근대의 위인을 쏘아죽인 흉한의 동생으로서 일제로부터 가혹한 탄압을 받았다.
그는 안중근이 자신에게 남겨준 영광과 시련을 한 몸에 지닌 상태에서 자신의 일생을 독립운동에 바쳐야만 했다.
1910년대 연해주와 중ㆍ러 국경지대에서 안정근은 동생 안공근과 함께 활동하였다.
이때 그는 여순에서 안중근 옥바라지와 공판투쟁을 참관하였고,
모친과 3형제의 가족 20명을 이끌고 목릉에서 생활기반을 닦았으며,
모스크바유학에서 돌아온 동생과 함께 니콜리스크에서 장사를 하였고,
친일파 김정국을 처단했으며, 니콜리스크에서 처음으로 벼농사에 성공하였고,
잡화상과 벼농사를 통해 독립운동 기지의 개척을 도모하였고, 러시아동포들의 민족운동에 가담하였다.
이러한 모든 일은 동생 안공근의 도움으로 이루어졌다. 안정근의 정치노선과 독립운동에 큰 영향을 미친 인물은 안창호이다.
그는 연해주 망명 후부터 안창호와 모든 일을 의논하였다.
동생 안공근이 1920년대 중반부터 안창호 일파와 대립하였던 반면, 안정근은 안창호를 형님으로 모시며 그의 독립운동을 도왔다.
따라서 1911년 봉밀산에서의 독립운동기지 개척운동, 1920년대 전반 상해와 북경에서의 독립운동,
1920~1921년 북간도에서의 독립단체 통합운동, 1925년 북경 근처에서의 농장개척운동,
1920~1930년대 흥사단 활동 등은 안창호와 긴밀한 연계하에 이루어졌다.
안정근의 가장 대표적인 업적은 북간도에서 독립군단체의 통합운동을 주도한 일이다.
그는 1920년 5월 하순 대한민국임시정부의 북만주 특파원으로 파견되어 독립단체의 통합을 주도하였다.
그의 헌신적인 활동 덕분에 극심한 갈등을 빚고 있던 북만주의 여러 독립단체들은 통합된 부대로 변모되었다.
이렇게 통합을 이뤄낸 독립군 단체들은 청산리전투에 참여하여 일본군을 무찔렀다.
안정근이 평생토록 가장 정력적이며 지속적으로 전개한 것은 적십자 활동이다.
그는 1910년대 중반에 목릉과 니콜리스크에서 독립운동가와 그 가족들을 후원하였고,
1920년대 전반 상해에서 대한적십자회 부회장으로서 난민 구제에 힘썼으며,
1920~1921년 청산리전투에서 부상한 병사들과 러시아로 이주한 독립군에 대한 구호활동을 벌였고,
해방 이후에 상해에서 대한적십자회 회장으로서 동포들에 대한 구호활동을 펼쳤다.
이러한 활동들은 그의 후덕한 인품, 안중근의 동생이라는 영광스런 배경, 독립 운동계의 거목 안창호의 지원,
처가의 막대한 경제적 지원 등이 작용한 결과였다.
그리고 안공근
(이하 펌)
황해도 신천(信川)에서 출생하였다.
1909년 평안남도 진남포보통학교(鎭南浦普通學校)에서 부훈도(副訓導)로 재직하던 중
큰형 안중근(安重根)의 의거 소식을 듣고 작은형 안정근(安定根)과 함께 중국 뤼순[旅順]으로 건너갔다.
그후 1919년 상하이[上海]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참여, 1920년 10월 임시파로외교위원(臨時派露外交委員)에 임명되었으며,
이어 12월 상하이 대한인거류민단의사회(大韓人居留民團議事會) 의원,
1921년 임시의정원 황해도 대표의원에 선임되었고, 1922년에는 이동휘(李東輝)·김규식(金奎植) 등과 함께
모스크바에 체류하면서 레닌 정부로부터 독립운동을 지원받기 위해 노력하였다.
1926년 2월 상해한인교민단(上海韓人僑民團) 단장이 되어 한인들의 인권보호와 민족정신 고취를 위하여 노력하였으며,
1926년 5월에는 상하이에서 이유필(李裕弼)·최창식(崔昌植)·오영선(吳永善) 등과 함께
독립운동촉진회(獨立運動促進會)를 결성, 민족의 해방과 독립운동가의 조직적인 단결을 위해 노력할 것을 주장하는
선언서를 발표하기도 하였다.
1930년 김구(金九)를 중심으로 결성된 한국독립당(韓國獨立黨)에서 특무공작을 주도·지휘하였고,
1931년 한인애국단(韓人愛國團), 1935년 한국국민당(韓國國民黨)을 조직하여 주요 간부로 활동하면서
친일분자의 암살과 독립군 양성에 주력하였다.
1937년 7월 중일전쟁이 일어나자 한국애국단(韓國愛國團) 대표로서 미국과 중국에서 활동하는
독립운동단체의 연명(連名)으로 '한국당호운단체(韓國黨護運團體)의 중일전국(中日戰局)에 대한 선언'을 발표하였으며,
같은 해 8월 한국국민당·재건한국독립당·조선혁명당 등과 미주의 대한인국민회·한인애국단·대한부인애국단 등을 통합,
우익진영의 연합체인 한국광복운동단체연합회(韓國光復運動團體聯合會)를 결성하고 좌익계열인
조선민족전선연맹(朝鮮民族戰線聯盟)과의 통합을 모색하는 한편 대일항전을 위하여 활동하였다.
1995년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
[네이버 지식백과] 안공근 [安恭根] (두산백과, 두산백과)
기타 참고 링크
http://cafe.naver.com/iahn/1562
최근 일본의 무라야마 전 총리가
한국을 방문하여 위안부 할머니들을 만나고 진심으로 사죄하는 모습이 보도 되었습니다
http://news.sbs.co.kr/section_news/news_read.sjp?news_id=N1002240819
너무나도 바람직한 일이죠.
그런데 그와는 상반되게 현, 아베정권은 도가 지나쳐도 너무 지나치더군요..ㅜ.ㅜ
죽어서 얼마나 큰 천벌을 받으려고 그러는건지....
안타까울 따름입니다.
지금이라도 늦지않았으니
위안부 할머니들 살아생전에 사죄하는 모습을 볼수 있었음 하는 바램이네요.
긴 글 읽어주셔서 감사드리며,
꼭 안중근 장군 3형제의 유해를 찾아서
모국에 평안히 모실 수 있는날이 하루빨리 왔으면 좋겠습니다.
남은주말 행복한 시간 되시길^^&
참 비교되는 삶이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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